지난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이탈리아 럭셔리 패션 하우스 발렌티노의 단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우아함과 창의적인 비전을 제시해왔던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가 19일(현지 시각) 프랑스의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다.
발렌시아가를 소유한 케어링 그룹은 1999년부터 발렌티노에 합류해 여성복·남성복·액세서리와 쿠튀르 등 모두를 거치며 발렌티노의 정신을 계승했던 피치올리를 발렌시아가의 차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간 발렌시아가를 이끌었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는 올 초 역시 케어링이 소유한 구찌로 자리를 옮긴다는 뉴스를 전격 발표한 바 있다.
독서광이기도 한 피치올리는 패션계 대표적인 로맨티스트 중 하나이자 쿠튀르 컬렉션으로 많은 찬사를 받은 인물 중 하나다. 피치올리는 이날 미국 뉴욕타임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패션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면서 “처음에 창립자의 시대에서, 크리에이티브 단계(phase)로, 이제는 인간 단계(human phase)다”라고 말했다. 이름값 있는 디자이너를 명성 이는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갈아 끼우는 게 아니라, 인본주의 철학적인 면모를 잇는 설계자이자 계승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샤넬·디올·구찌 등 15개 이상 유명 패션 하우스가 디자이너를 교체하는 등 패션계에서 거의 이전에 없을 ‘대란 수준’의 변화가 있었다.
피치올리는 브랜드를 자신의 틀로 새롭게 뜯어고친다기보다는 자신보다 앞서 브랜드를 거친 이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들을 존중하면서 변화를 보이겠다는 각오다. 피치올리는 이번 발표에 창립자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발렌시아가를 패션계에 다시 올려놓은 니콜라 게스키에르(현 루이비통 여성 부문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게스키에르가 떠난 후 인수인계를 관리한 알렉산더 왕, 뎀나 등 모든 디자이너에게 감사의 편지글을 올렸다.
그는 이미 뎀나의 발렌시아가 쿠튀르 쇼에 참석하는 등 친분이 있었던 터였고,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당장 매장을 다시 꾸미거나 오래된 재고를 없애고 그의 디자인으로 교체할 계획은 없다는 것이다. 피치올리는 현재 살고 있는 로마 외곽에서 파리로 이주할 예정이며, 뎀나는 7월에 마지막 쿠튀르 쇼를 끝으로 공식적으로 떠나기 전에 한 달 동안 발렌시아가에서 뎀나와 겹쳐서 일할 예정이다. 피치올리는 자신과 뎀나의 스타일은 분명 다르지만 패션에 대한 접근 방식은 공유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큐레이터가 아니라 디자이너입니다. 집(패션 하우스)을 해석하려면 단순히 기록 보관소(아카이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의 정신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대를 목격하도록 부름받았고, 우리의 임무는 그 시대와 관련된 아름다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